이기선은 김소원과 이수은 그리고 새로운 질서와 함께하며 안내장과 이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목록은 영원히 미완이며 계속해서 고치는 중입니다. 때문에…

기억력이 나쁘다. 엄마와 친구들이 "그거 기억 안 나?!" 하고 경악하는 걸 종종 보면서, 그들의 기억 속 이기선이 누구인가 하는 의심이 든다. 결정적으로 20대 중반부터 그 이전의 기억을 상당 부분 잃었다. 심한 다이어트 탓일 수도 있고, 그 즈음 주변 환경이 크게 바뀌어서일 수도 있다.

그래도 추정컨대 존재했을 것이다. 한 가지 증거는, 서울시 동작구의 지금은 폐업한 희망병원에서 발급한 출생 증명서다.

첫 기억은 확실하지 않다.

이기선의 삶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팀 버너스리의 머릿속에 웹이 있던 때, 한반도에 태풍이 잦던 여름이고, 대한항공 여객기 리비아 추락 사고가 발생한 날이지만 갓 출산한 미경은 고통스럽고 더울 뿐이다. 미경의 아버지는 사주팔자를 독학했고, 스물일곱 막내딸이 낳은 첫 딸의 이름을 짓는다. 서울로 이주한 후 태어났다고 해서 아름다운 서울이라는 이름을 붙인 딸과 달리, 획을 따져서.

영유아 때부터 입이 짧다. 식사 때마다 빨리 먹으라고 야단 맞는다. 집 방문에 걸어 놓은 그네에 앉아 저녁 밥을 씹으며 졸다가 뒤로 자빠진다. 뒤통수를 일곱 바늘 꼬맨다. 수술이 끝나고도 입안에는 밥알이 남아 있다. 이후 병일은 등 받침이 있는 그네를 새로 사서 매단다.

설거지하는 미경에게 터득한 맞춤법을 자랑하듯 묻는다. 엄마, 가방은 기역에 아에 비읍에 아에 이응 받침이죠? 미경은 대답할 정신이 없다.

아파트 단지 풀밭에서 미경이 시키는 대로 살찐 신생아 동생인 준기를 무릎에 앉히고 미경이 셔텨 누르길 기다린다. 아기의 무게에 휘청거린다.

마트에서 세탁기 장난감을 보고 사달라고 한다. 미경과 병일은 버릇을 들이기 위해 절대 사주지 않는다. 바닥에 누워 울고 불고 난리 치더라도. 그후로 기선은 뭔가 사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유치원에서 만든 종이 별 왕관을 급히 찾아 쓰고, 사진 찍자고 부르는 미경에게 달려가다가 넘어져 입술 위를 찧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사진기 앞으로 달려간다.

유치원에 있던, 색이 예쁜 고무줄을 몇 개 몰래 가방에 숨긴다. 그 이후로 절도를 한 적은 없다.

미경과 병일이 그림 일기장을 처음 사준다. 그날 있던 일을 순서대로 적는다. 인생 최초의 기록이다.

아침마다 스스로 영어 공부를 한다. 미경이 칭찬하는 게 기분 좋다.

침대에 누워 죽음의 공포를 처음 느낀다. 그후로 이따금씩 죽음의 공포가 찾아오는 밤이면 미경과 병일의 침대로 가 잠시 머문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글을 잘 썼다는 칭찬을 처음 받는다. 매일 아침 같이 등교하는 친구가 눈이 부어 보여 혹시 운 걸까 신경이 쓰였다는 내용이다. 담임 교사가 아이들 앞에서 그걸 읽어주어 친구에게 미안하다. 다른 반이긴 하지만.

숙제용 일기에 담임 교사가 적어주는 평가를 의식한다. 칭찬을 기대하고 쓴 일기보다도, 날이 추워서 그늘을 피해 해 비추는 곳을 따라 걸어갔다,라는, 대충 쓴 짧은 일기에 교사가 더 높은 점수를 주자 의아하다. 예측할 수 없는 독자의 반응을 처음 마주한 때다.

나가사키로 가족과 단체 여행을 간다. 사이판 후로 두 번째 해외 여행이다. 부산까지 기차를 타고 간 뒤, 부산항에서 배를 탄다. 아소산에서 유황 냄새를 생전 처음 맡는다. 하우스텐보스에서 병일은 기선에게 미키와 미니가 그려진 오르골을 사준다. 디즈니 만화영화 클로징 멜로디가 나오는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이사를 가며 처음이자 유일하게 전학을 한다. 유치원 때부터 단짝이던 친구와 함께다. 문이과로 나뉘기 전까지 거의 모든 학원과 과외를 함께하게 될 그 친구는 이후로 거의 모든 방면에서 기선보다 우월할 것이다.

그곳은 88 서울올림픽 때 조성한 아파트 단지다. 단지 안의 초, 중, 고등학교를 다니며 총 17년 가까이 그곳에서 살게 된다.

병일은 출근길에서 아이엠에프, 나는 에프다,라고 농담을 한다. 그것은 기선에게 아이엠에프의 유일한 기억이 된다. 기선은 마지막 군고구마라는 제목의 첫 단편 소설을 쓴다. 아이들을 위해 매일 군고구마를 사오던 아버지가 실직을 하고 마지막 군고구마를 사온다는 신파다.

병일이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누워 하늘을 보면서 하늘이 사실 밑에 있다고 상상한다.

아파트 상가 음반 매장에서 핑클의 정규 2집 화이트 테이프를 산다. 팬심은 보아를 거쳐 지오디로 이어져, 음반 발매일이면 상가 음반 매장에 달려가 브로마이드와 씨디를 산다. 노래를 다 외우고, 지오디가 광고하는 하몬스를 사 먹는다. 한데 친구들과 간 연말 시상식 공연에서 지오디를 제치고 핑클이 대상을 받자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지른다. 그때 깨닫는다. 자신이 지금 하늘색 풍선을 흔드는 건 친구들이 다 지오디 팬이기 때문이라는 걸, 실은 마음속에 핑클이 있었다는 걸. 걸그룹에 대한 사랑은 f(x), 레드벨벳, 뉴진스로 이어진다.

미경은 독서, 논술 과외를 한다. 분심이 주기적으로 집에 와 손주들을 봐준다. 손주들은 담백한 반찬과 경상남도 남해 사투리에 익숙해진다. 분심은 기선의 방에서 잔다. 분심은 자다가 가는 게 소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기선은 가끔 잠이 든 그녀가 숨을 쉬는지 확인한다.

친구들과 비밀 일기장을 쓴다.

폐휴지 모으는 날, 신문지를 노끈으로 묶어 가져간다. 방과 후 폐휴지 모은 트럭 위에 올라가서 논다.

처음 접속한 웹사이트는 해리 포터 웹사이트와 써스데이 아일랜드 웹사이트다.

해리 포터 한국어판이 출간된다. 밤을 새서 읽고 호그와트에서 편지가 오기를 고대한다.

초등학교 때까지 자신이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후로 한 번도 글로 상을 받지 못하면서 서서히 마음을 접는다.

비디오 가게에서 친구들과 주온 등 공포 영화를 빌려 본다. 시험 끝나면 학교에서 다같이 금발이 너무해, 화이트 칙스 같은 하이틴 영화를 시청한다.

미경을 졸라 캘빈 클라인 진, 퓨마 스피드캣을 산다.

여고괴담 2를 촬영한 여고에 진학한다. 교복이 예쁘고 교정이 예쁜 것이 마음에 든다. 쉬는 시간 10분에는 많은 걸 할 수 있다. 매점에서 샐러드빵을 사 먹고, 운동장을 산책하다가 종소리에 뛰어 들어간다.

체육 시간 배구공 토스를 하는 수행 평가 때, 처음에 엉망이던 기선은 과외까지 받고 기어코 만점을 받는다. 아름은 충격을 받는다.

학교 수영장에서 수업을 받다가 유리 조각에 발이 찔려, 학교에 온 미경과 함께 병원에 간다. 발을 꼬맨 뒤 같이 외식을 한다. 잠뱅이라는 간판이 이상하게 눈에 들어온다. 발의 상처가 가려워질 것이다.

아침마다 진실과 상가 스타벅스에서 만나 자바칩 프라푸치노를 사 들고 등교하는 치기를 부린다.

아파트 앞 공원 벤치에 누워 나무와 하늘을 본다. 흐린 날 분홍빛 하늘을 보는 게 좋다. 문제집 여백에 낙서한다. 대학교 진학은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고, 그때부터 새로 삶을 시작하게 되리라고. 이는 미래를 정확히 예언한 것이다. 에쿠니 가오리 소설을 읽고 쿠안트로가 무슨 맛일까 상상한다. 듀나의 태평양횡단특급을 읽는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읽고는, 자포드 비블블락스의 우주선이 온다면 가방 같은 건 챙기지 않고 곧장 함께 떠나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잡지 지큐, 보그 걸을 본다. 수능 전 방에서 미경 몰래 경성스캔들을 본다.

대학교 입학 통지서를 받고 입학하기 전까지, 애거서 크리스티, 무라카미 하루키, 필립 K. 딕을 방바닥에 쌓아 놓고 읽는다.

사회과학 학부로 입학하는데, 1학년 때 학점을 바탕으로 2학년 때 전공 학과를 택하는 방식이다. 학점이 낮아, 커트라인이 낮은 학과 중 그나마 흥미가 가는 심리학을 택한다. 심리학에서 배우고 남는 건 심리학이란 사람의 마음이라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는 학문이란 사실이다.

1학년 첫 학기 때 외계 행성과 생명체라는 수업을 듣는다. 드레이크 방정식에 따라 외계에 생명체가 존재할 확률을 계산하는 수업이다. 그후로도 분자 생물학 같은 타과 수업을 기웃거린다. 그 같은 외도은 영어영문학 복수 전공으로 이어진다.

이동신 교수의 수업을 발견한 후로 학기마다 찾아 듣는다. J. G. 밸러드, 스티븐 킹, 마거릿 애트우드 같은 작가를 다루는, 영어영문학과에서 유일한 수업이다. 방황하던 대학 생활에서 공부의 재미를 처음 느낀다. 대학원은 무리라는 걸 깨닫는다. 그런데 하고 싶은 건 없다.

졸업하고 작은 회사 인턴을 하다가 부킹닷컴에 입사한다. 집 앞 공원을 걷다가 토끼를 구경할 때 합격 전화를 받는다. 랭기지 스페셜리스트라는 희한한 직책이다. 상하이, 도쿄, 싱가포르, 암스테르담 지사에 출장을 가고, 다른 지사의 또래 친구들을 사귀고, 보고 싶다는 말을 각국 언어로 익힌다. 몇 번 만나지 못하고 사내 메신저로 수다만 떠는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워씨앙니, 아이따이. 정작 서울 사무실에서는 적응하지 못한다.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로 직장을 옮긴다. 여행업계를 목적한 건 아닌데, 하다 보니 그렇게 된다. 꿈의 직업이다. 처음에는 살면서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

처음 자취를 시작한다.

코로나19가 확산되고 회사에서 잡지 편집팀을 정리하며 퇴사한다.